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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위에 찰리 채플린 레이먼 사비냑 기획전

by 그네* 2015.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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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전시를 관람했다. 


상상마당에서 열린 캔버스 위에 찰리 채플린 레이먼 사비냑이었다. 거장이라는데 아무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낯설지만 프랑스에서는 국보급 포스터 디자이너이자 광고 기획자이다. 광고지만 이를 예술의 단계까지 끌어올려서 프랑스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거장이라고 한다. 



광고를 예술로 격상시킨 레이먼 사비냑(Raymond Savignac, 1907-2002)은 위트 충만한 포스터로 팝아트의 창시자가 되었다. 사비냑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포스터 아티스트로 식료품, 항공사, 서적, 영화 등 당시 대다수의 광고물을 직접 그려낸 화가다. 1949년 광고에 처음으로 개그를 도입한 ‘밀크 봉사봉 (Monsavon au lait)’ 포스터로 레이먼은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하루 아침에 성공 궤도에 올랐고, 포스터 광고 주문이 쇄도했다. 동시에 각계에서 극찬과 모방이 이어졌다. 그는 이렇게 자신만의 강한 개성으로 한 시대를 이끌며 포스터의 역사에 호기롭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95세를 바라보는 2002년까지 미국, 이태리, 독일, 벨기에,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의 작품은 파리장식미술관에도 소장돼 있으며, 프랑스에서는 국보급 작가로 알려져 있다. (출처 : MK뉴스)




(밀크봉사봉 : 야수파 영향을 받은 비누 광고)


운 좋게 큐레이터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고 그에 대해 더 알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작품도 좋았지만 개인적인 스토리가 더 흥미진진했다. 42살이 되어서 그의 작품 밀크 봉사봉이 화제가 되면서 성공 궤도에 올랐다. 이후 50대에서 70대 사이가 그의 인생에서 전성기였다. 70대에서 90대에는 은퇴를 하였지만 트루빌(Trouville)에서 지방 축제를 알리는 광고 포스터 등을 계속해서 제작하여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흔히들 말하는 타고난 재능, 금수저 집안의 천재가 아니라서 더 좋았다. 늦게 빛을 발하여 인생은 40대부터 라는 그의 특이한 이력은 작품에 더 집중하게 했다. 20-30대가 가장 빛나는게 아니라 50-70대에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고 인정까지 받았다는 점에서 뭔가 더 열심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때까지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을 위해 홍보 포스터를 만들고 시립 미술관에도 작품을 기증했다. 끝까지 아름답고 열정 가득한 그의 모습이 프랑스인들에게 더 사랑 받을 수 있는 이유였지 않을까 싶다. 


자건거 선수를 꿈꾸던 국보급 화가 

레이먼 사비냑은 1907년 프랑스 파리의 잔아쉐뜨(Jeanne -Hachette) 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의 꿈은 자전거 선수였지만 청년이 된 후 비현실인 소망임을 깨닫고 디자이너로 RATP(파리교통공사)의 전신인 TCRP에 입사한다. 이어 광고 만화를 만드는 로르탁(Lortac)에서 일하게 된다. 이곳에서 꼭두각시를 이용한 최초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만들었고, 포스터를 모사하는 일을 통해 처음 광고 포스터를 접하게 되었다. 

1929년 사비냑은 군복무를 마치고 광고회사 미라마르(Miramar)에 입사하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근근이 포스터 작업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1933년 당시의 유명 포스터 도안가인 카산드르(Cassandre)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포스터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1938년 카산드르가 미국으로 떠나며 사비냑은 여러 회사에서 일을 했지만, 창의적인 발상엔 관심없고 권위적인 관료주의를 견디지 못했다. 그는 이때의 기억을 전쟁 중 경험했던 병영 생활보다도 더 가혹한 시절로 기억한다. 사비냑은 빌모(Villemot)를 비롯한 젊은 작가들과 함께 다니엘카사노바(Danielle-Casanova) 거리의 작업실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업계에서 경쟁자로 꼽히던 빌모와 구별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콧수염을 기르게 되었는데, 콧수염은 사비냑의 상징이 되었다. 


사비냑은 뛰어난 광고 기획자이기도 하다. 1950년 그가 처음으로 선보인 ‘비주얼 스캔들’이란 이질적인 이미지가 결합된 시각적 충격이 사람의 의식 내부에 강하게 작용을 일으키는 방식을 뜻한다. 그는 “광고가 소비자의 기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충격을 줘서 광고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처 : MK뉴스)


프랑스어로 광고가 만들어져있다보니 어떤 광고인지 메시지를 유추하는 것도 재밌었다. 포스터에는 개그감이 충만하여 즐겁게 볼 수 있고 밝은 색감과 따뜻한 아날로그적인 그림체에서는 레이먼 할배의 푸근함이 느껴졌다. 광고 메시지를 알기 전에는 무슨 광고인지 싶었다가 해석을 들으면 웃음이 피식 나왔다. 어떤 것은 꿈보다 해몽 격도 있었다. 



볼펜 빅광고를 자주 맡았다고 한다. 그녀가 뛴다. 그녀가 뛴다 라고 오른쪽 상단에 새겨진 것인데 발이 스케이트날이고 머리가 휘날릴만큼 빅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다. 그녀라고 하는데 생긴게 그녀가 아닌게 개그 코드라고 한다. 




에어 프랑스 광고도 많이 맡았다. 당시 장거리 노선이 많이 없던 항공사들 사이에서 에어 프랑스는 자신들의 장거리 여행을 강조하기 위해  Long Mon de(=World) 라는 문구를 내세웠다. 이를 만국기로 휘감은 기린으로 발랄하게 표현해 냈다. 


그는 크게 그리는 걸 좋아해서 2m 넘는 캔버스에 그린 그림도 많다고 한다. 이번 전시에도 사이즈 때문에 가져오지 못한 그림이 많다고 했다. 또한 평면적인 그림체라 늘 테두리 선을 그렸다. 코를 이상하리만큼 높게 그리고 구두가 주로 같은 모양으로 그렸다고 한다. 소름끼치게 잘 그리기보다는 따뜻하고 조금은 거친 그림체이다. 


가장 좋았던 그림은 트랜지스터 광고였다. 


그의 작품에서 분절은 또다른 특징이다. 성인 남자의 몸이 잘렸는데 얼핏보면 어린 아이의 몸에 얼굴은 어른이다. 어렸을 때 들은 노래를 어른이 되어서도 들을 수 있을만큼 수명이 긴 트랜지스터라는 메시지를 담은 광고돠. 파란색을 좋아하는 내게 저 색감이 좋았고 메시지도 푸근했다. 




또다른 인상적인 작품은 프랑스산 담배 광고에서 '프랑스산'임을 강조하려 연기를 프랑스 지도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기발했다. 




실제로 보면 되게 아름다운 색감과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르노 자동차의 광고다. 4로 통일한 깔맞춤의 진가가 보인다. 4개의 바퀴 4개의 좌석 4.472원한다는 깨알같은 정보를 담아 놓았다. 




노란색은 그의 상징적인 색이기도 한다. 친구는 빅 광고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빅은 볼펜의 볼을 개발하면서 대표적인 문구류 브랜드가 되었다. 이 볼을 상징으로 하여 소년의 몸에 그려서 비주얼 스캔들 형식으로 사람의 이목을 끈다. 원래는 볼펜을 학생들에게 쓰는것을 장려하지 않았는데 이 광고 이후에 사회 분위기가 바껴서 학생들도 볼펜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포스팅을 쓰다보니 레이먼 샤비냑 포스터가 많은 사이트를 찾아서 링크를 남겨둔다.

http://www.artnet.fr/artistes/raymond-savignac/r%C3%A9sultats-de-vente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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