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벽녀의 연장 사용기
내 철벽의 두께는 스스로가 견고하게 만든 것이었다. 내 시간의 9할은 친구요, 소개팅보다는 언니들과의 수다였다. 도대체 어떤 남자를 만나고 좋아하려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더 난리였다. 마치 너는 철벽녀 태초의 뿌리 같은 존재라며 놀려댔다.
그렇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철벽에 스르르 균열이 가기 시작하였다. 곁에 6년을 두었던 친구에게 마음이 동해버렸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순간 이 사람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이 사람이여서 좋은 건지, 내가 외로워서 인지, 아니면 잘해주는 그 행동이 좋은 건지 궁금했다. 스물다섯 해 내내 두근거리지 않던 마음이 무엇 때문에 동한 것인지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마음 속에서 거대한 철벽과 이를 깨부수려는 연장이 서로 맞서고 있었다.
#연장1. 되새김질
내 철벽을 해체시킨 첫 번째 연장은 ‘되새김질’이었다. 그 친구와 함께 있었던 순간을 다시 머릿속에서 펼쳐본다. 내가 말한 단어, 그 아이의 눈빛, 반응을 계속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와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엄지손가락을 액정에 대고 되돌릴 수 있는 모든 시간까지 거슬러가 우리의 대화를 다시 보았다. 처음에는 마냥 그 되새김질이 행복하다. 그러다 사소한 것이 대단한 무언가로 변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낯선 나의 모습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런데 왜 자꾸 이 생각을 멈출 수가 없는 거지.’
연장의 되새김질은 생각지도 못한 영화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시간쯤 너를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집 주위를 한참 헤매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떠내려 오는 와중에 저 멀리서 갑자기 네가 보인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떻게 마주할 수조차 없을 것 같았다. 폰에 코를 박고 올라가던 내게 그 친구는 긴가민가하다 빙긋 웃으며 내 얼굴을 확인한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갑자기 만나 반가운 듯 인사하며 헤어진다. 돌아오는 길목 내내 ‘그 시간에, 그 자리에’를 되뇐다.
마음을 늘 통제해왔던 철벽이 힘을 발휘한다. 마음 졸이며 연락을 기다리고 상대를 생각하는 것이 불안했다. 혼자였을 때처럼 고요하고 하루 종일 온 생각을 잡아먹을 만큼의 고민이 없던 것이 그리웠다. 익숙하지 않은 내 모습이 낯설어 더 꽁꽁 마음을 숨겼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음파의 진동이 더 큰 감정의 진폭을 만들어내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커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그 사람 앞에서 나의 철벽은 용기 내어 건네는 말을 잘라내는 무기가 되었다. ‘너와 내가 잘 될 수 있을까’라는 그의 물음에 ‘잘 될 거였으면 예전에 잘됐을 거’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에 ‘속을 알 수 없어 어려운 사람’이라는 말을 뱉어버린다. 남자와 여자로서 서로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는 그 공기의 무거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공기를 소화시킬 연애 체력과 순발력이 내겐 벅찬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새김질이 만들어낸 균열은 곧바로 뚝방을 무너뜨렸다. 집으로 돌아가 나처럼 우리의 시간을 되새김질한다는 네가,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꼼꼼히 기억하는 네가, 곰 인형을 주고서 그 인형에 질투하는 네가 연락을 툭 끊어버리는 순간 세상이 갑갑해졌다. 무엇이 너를 동굴로 보내버린 것인지 이해할 수도, 이해할 힘도 내겐 없었다. 그저 용기 내어 문자를 보내고 답을 하루 종일 기다렸다. 끝내 도착한 너의 연락은 너무나 단출하여 내쳐진 기분까지 들었다. 하루 내내 꼬리를 무는 실망감과 답답함에 당장이라도 전화를 해서 모두 털어놓고 잊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연장2. 상처받을 용기
무엇보다 나는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생에 그리 자주 오지 않는 좋아한다는 고백을 할 기회가 어쩌면 지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난 뒤, ‘그래도 내가 그 애를 좋아했었는데’라며 아쉬워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보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전화에, 메시지에 숨어서가 아니라 직접 철벽을 부수고 싶었다.
‘우리 만나서 이야기 하자.’ 마주한 두 사람. 그러나 사실은 내 마음 속 철벽과 내가 맞서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철벽녀의 첫 연장질은 서툴고 또 서툴렀다. 한 번도 마주해서 마음을 누군가에게 표현해본 적이 없었기에 내 ‘감정’을 ‘생각’처럼 말하고 있었다. 백분토론인 것처럼 그 때 우리가 했던 행동을 분석하고 우리의 가능성, 그 후의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로의 말을 맞받아치고 마치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서로 보여주지 않으려 몹시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난상토론에서 아주 담담하고 직설적인 화투로 ‘나는 너를 좋아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친구로 지내기가 힘들다’라며 쏟아내듯 말을 했다. 쏘아대듯 터져 나온 마음이 온전히 그에게 다가가길 바라는 것은 그야말로 꿈도 야무진 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고백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웃으면서 눈을 보고 이야기 하는 그런 우리의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 나의 첫 연장질은 실수투성이에 명백한 실패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메신저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고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다시 철벽을 치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그동안 미뤄놓았던 영화, 드라마를 몰아보며 모든 생각을 비워냈다. 그러니 또 살만했고 차라리 혼자인 게 더 속편하다는 생각과 함께 ‘할 만큼 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연장3. 눈 내리는 밤
‘진짜 내가 할 만큼 한 것이었을까. 만약 내가 이렇게 말했다면 달리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면 마음이 시큼시큼했다. 1월의 어느 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저녁이었다. 집 건너편에 있는 학교로 가 겨울이면 늘 정문에 있는 구유를 보고 싶었다. 예수님이 태어난 마굿간을 재현한 구유는 그 특유의 허름함과 온화한 불빛 때문에 어느 크리스마스 조형물보다 따뜻했다. 정문으로 가는 길목에서 천천히 내리는 눈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지난 정문 어디에도 구유는 없었다. 실망을 하며 캠퍼스 정문 옆 화단이라도 담아가자며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휴대폰 액정 안으로 그가 걸어 들어왔다. 서로를 발견하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늦은 밤 방학이라 그가 학교에 있을 것이라 생각지 못하였고 그도 내가 늘 잠에 쫓겨 11시도 넘기지 못하고 잠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늦은 시간 서로가 눈앞에 있다는 것에 놀라고 또 놀랐다. ‘잠 안 오면 우리 좀 걷자’라며 그가 말을 건넸고 그 친구의 우산 아래에서 우리는 눈 내리는 캠퍼스를 걸었다.
눈. 눈이 다시 내 마음의 철벽을 허무는 연장이 되었다. 눈이 내리는 그 순간 마음을 숨기거나 꾸밀 수가 없었다. 내가 표현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온전히 전했다.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도 그렇게 말했을 만큼 한 마디 한 마디에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전하였다. 한 번의 실패가 있었기에 더 간절했고 그만큼 마음은 더 자라나 있었다. 이젠 끝이라고 후회만 하던 내게 하늘이 눈을 내려 도와준 것 같았다.
앞으로도 눈이 내리면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더 표현하고 안아주고 솔직해지라고 눈은 내게 용기를 줄 것 같다. 마음을 마주하고 더 열렬히 사랑하라고 눈은 나의 철벽을 부드럽게 녹여 주었다.
http://www.citylunch.co.kr/gobongbap/class_articles/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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