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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프로젝트/시청역의점심

4월 8일 말문의 닻 (4월 - 성격 / 2015 하루달력 )

by 그네* 2015.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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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8

말문의 닻

김근혜

 



이제 막 걷기 시작했을 때쯤 동네에서 나는 ‘잘 사라지는, 사진관집 작은 딸내미’로 소문이 났다. 놀러 가는 언니를 뒤따라 나가다가 없어지거나, 해운대 인파 한가운데서 사라지는 것은 약과였다. 명절 친척집 투어를 마친 뒤 들어가라며 집 앞 대문에서 등을 떠밀었는데도 사라질 때가 있었다. 코 앞에서 사라진 것에 어이없어 하며 온 가족이 아찔해 할 때쯤 동네 비디오 집에서 딸내미 데려가라며 전화가 왔다. 천연덕스럽게 입구 옆 소파에 턱 하니 앉아 외삼촌이 보여 따라갔다고 조잘조잘댔다. 외할머니 집에서 자고 있을 외삼촌을 말이다.
작은 딸내미는 타고난 오지랖도 자랑했다. 손님이 명함사진 찍으러 사진관에 오면 방 안에서 자다가도 벌떡 뛰어나왔다. 엄마가 큰 카메라 속으로 고개를 쑥 넣고 사진을 찍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손님에게 손가락을 쭉쭉 뻗어대며 말했다.
“똑바로 앉아!! 가만히 있어!!”
옹알이 혼구녕을 해대는 꼬마 때문에 손님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참을 박장대소 한 뒤에야 렌즈에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그랬던 작은 딸내미가 학교를 가더니 친구들 앞에서는 말수가 줄고 조용해졌다. 분명히 아는 내용이라 입을 뻐끔거리면서도 손을 들어 발표를 못하자 엄마는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엄마는 사람들 앞에서 동화를 큰 소리로 읽으며 얼굴과 몸짓으로 표현하는 연습을 하도록 했다. 혼자서 쭈뼛거릴까 봐 제일 친한 준영이를 같이 붙여 구연동화를 시켰다.
그 때 내 눈에 다른 사람의 눈을 익히는 방법을 배웠다. 내 눈에 익은 한 사람만 있어주면 수많은 낯선 눈동자들 속에서도 많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 함께 배웠던 준영이에게 의지하던 버릇 때문인가 보다. 준영이가 닻이 되고 그 닻이 있어야만 나는 주변 사람들의 눈을 보고 안심하며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커나가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닻을 내릴 수 있게 되었고, 열린 말문은 닫힐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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