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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도현의 발견

by 그네* 2015.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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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안도현 지음



p.74 <표준>

다만 '표준'이 언제나 '표준화되지 못한 것들'을 객체화시킨다는게 문제다. 표준어 시행규칙도 그렇다. 서울 사람들은 솥 바닥에 눌어붙은 밥도 '누룽지', 여기에 물을 붓고 끓여도 '누룽지'라 한다. 전라도에서는 눌은밥을 '깜밥', 물에 끓인 걸 '누룽지'로 구별해서 부른다. 방언으로 치부하는 언어가 더욱 세밀하고 풍부하다는 것은 표준어의 빈약성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공양>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벌의 날갯짓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꽃 향기 육십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 두 치 반

외딴집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줄 칠만구천 발

한 차례 숨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울음 서른 되


표준어의 정의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웃긴다고 생각했다. 현대 서울말을 쓰지 않으면 마치 교양 없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새내기로 처음 서울로 왔을 때도 동기들은 이런 표준어 정의를 들이대면 놀렸다.(놀린 녀석이 김해 출신인게 아이러니다.) 나는 표준어를 쓰고 싶지 않다. 획일화 되어가는 말투가 싫다. 내 사투리를 그대로 이어 나가고 싶다. 사투리를 통해 내게 전해져오는 문화적 유전자를 잃고 싶지 않다. 


p. 78 <줄임말>

길게 불러도 품위가 있고 아름다운 말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이십팔점무당벌레'나 '검은머리물떼새'나 '알락꼬리마도요' 같은 이름, 아름답지 않은가. 이것을 새, 혹은 도요새라고 한다면 수천 킬로미터를 먼 나라에서부터 깃털이 해지도록 날아온 수고가 잘 느껴지지 않을 터. 아름다운 것들은 조금 천천히, 길게, 조목조목 말해도 좋지 않을까 ?


나는 줄임말 애호가다. 효율적이다거나 그런 이유보다는 하나의 또래문화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할 때 더 신이 나고 그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이어간다. 딱딱 무슨 말을 쓰는 동안에도 친구들의 웃음 소재는 튀어 나가 이미 저멀리 가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보지 못했던 길게 말하는 아름다움을 마음에 담게 되었다. 세세하게 눈에 보이듯, 킁킁 거리며 만지고 싶게 만드는 글의 소중함을 ! 



p.108 <똥말>

<101번의 아름다운 도전>이라는 책을 읽었다. 2005년 봄 제주의 목장에서 태어난 예쁘고 늘씬한 암망아지 이야기다. ‘차밍걸’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얻은 이 녀석은 체격이 왜소하고 겁이 많았다. 식성도 좋지 않아 자주 주인의 애를 태웠다. 2008년에 경주마로 데뷔해서 2013년 가을에 은퇴했다. 경주마로 뛸 때의 기록은 101전 101패. 우승을 한 번도 거머쥐지 못했다. 한국 경마 사상 최다 연패의 기록이라 한다. ‘똥말’이라는 수치스런 별명까지 얻었지만 패배를 밥 먹듯이 하는 차밍걸의 팬들이 경마장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1등이 아니라 패배를 응원하고 패배에 열광하는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어떤 팬은 “자기보다 큰 말들 틈에서 끝까지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면 성실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을 보는 듯”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차밍걸의 이야기는 1등만을 숭상하는 세상에 대한 신랄한 야유라고 할 수 있다.

한국경마 연패기록(101패)과 현역 경주마 최다출전기록을 갈아 치우며 화제를 모았던 8세 암말 차밍걸(14번)이 28일 오후 경기 과천 서울경마공원 경주로에서 은퇴전 마지막 경주를 펼치고 있다. 2013.09.28. /뉴시스

봄날의 들판이 푸르게 물드는 것은 작은 풀잎 하나하나가 어깨를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이, 하찮은 것들이,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을 우리는 왜 잘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나 아닌 것들의 배경이 된다는 뜻이지.” <연어>라는 책에 쓴 문장이다. 비록 두드러지지는 않아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래서 아름답다.차밍걸은 경마장에서 101번 우승한 말들의 훌륭한 배경이었다. 그게 패배의 매력이다.


똥말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렇게 경주라고 보는 것 자체가 경쟁의 연속선 상으로 인생을 보는 꼬인 시선일까. 매일 똑같은 길을 뛰어가는 경주마 보다는 풀이 흐드러지는 잔디를 밟고 새로 뛰어나가는 말이 되고 싶다. 1등도 꼴등도 없는 그런 나만의 길로 !


p.112 <기도>

긴 것은 기고 아닌 것은 아니다 말하게 하소서. 눈치 보느라 눈이 한쪽으로 몰려 붙은 도다리로 살아온 시간을 뉘우치게 하소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다시는 입 밖에 꺼내지 않게 하소서. 절실하게 사랑해야 할 것들과 죽도록 미워해야 할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게 하소서. 길이 없다고 두리번거리지 말고 길이 되어 걸어가게 하시고, 내가 내 운명의 주인임을 아프게 새기며 살아가게 하소서.

바람 부는 날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두시고, 어두워지면 우주의 어둠이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하소서. 평수 넓은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배기량 많은 승용차를 탄다고 해서 적게 먹고 적게 싸는 칠점무당벌레의 삶보다 우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나의 밥그릇이 소중한 만큼 남의 밥그릇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소서.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울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울음소리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남의 노래는 안 듣고 제가 부를 노래의 목록이나 뒤적거리는 노래방에서는 노래하지 않게 하소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게 하시고, 나뭇잎이 튕겨 올리는 햇빛 한 오라기도 감격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으로 하여 내 마음속 물관부에 늘 사시사철 서늘한 물이 흐르게 하소서. 당신과 나 사이의 아득하고 아득한 거리를 자로 재지 않게 하시고, 당신을 그리워하는 미음을 저울로 달지 않게 하소서.

마음을 다잡게 한다. 종교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속으로라도 말하고 들어달라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의 무게 중심을 견고히 할 수 있기 때문에.


p. 118 <여>

나희덕 - 여, 라는 말 


잊혀진 것들은 모두 여가 되었다

망각의 물결 속으로 잠겼다가

스르르 다시 드러나는 바위, 사람들은

그것을 섬이라고 부를 수 없어 여라 불렀다

울여, 새여, 대천어멈여, 시린여, 검은여.....

이 이름들에는 여를 오래 휘돌며 지나간

파도의 울음 같은 게 스며 있다

영영 물에 잠겨버렸을지도 모를 기억을 

햇빛에 널어 말리는 동안

사람들은 그 얼굴에 이름을 붙여주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사라져버리는 여도 있다

썰물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 바위를 향해서도 여,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여가 드러난 것은

썰물 때가 되어서만은 아니다

며칠 전부터 날개를 퍼덕이던 새들 때문이다

그 젖은 날개에서도 여, 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가 보여주는 쓸쓸함 때문인지 청사포가 떠오른다. 겨울바람 차분히 노다니는 청사포에서 여들은 잘 있으려나.


p.142 <숨비소리>

바닷속 깊은 곳까지 잠수한 뒤 물 위로 떠올라 참았던 숨을 힘껏 내쉬는 소리, 바로 숨비소리다. 호오이...... 제주 해변을 지나가다 보면 누군가 휘파람을 부는 것 같은 이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이 소리는 멀리서도 또렷하게 들린다. 아무런 산소호흡 장치 없이 수심 20여 미터를 내려가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은 뒤에 비로소 내쉬는 해녀들의 숨비소리. 숨비소리는 나 여기 이렇게 끄떡없이 살아있다고 세상에 보내는 신호다. 숨비소리를 듣고 싶다. 


숨비소리라는 말도 참 예쁘다. 헐떡이며 심장이 터질듯한 그 숨이 '숨비소리'라고 표현되는 순간, 삶의 의지를 다 잡고 더럽고 어려운 것은 뱉어내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p. 147. <보리밟기>

봄에 파릇파릇한 풀을 밟으며 걷는 것을 답청(踏靑)이라 한다. 


풀을 밟아라

들녘에 매 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정희성 시인이 1974년에 낸 시집 <답청>에는 어두운 시대를 인내하던 선비의 목소리가 배어 있었다. 봄이 와도 세상은 어둡다.


아직은 세상이 어둡다. 나는 뭘하며 먹고 살아야 하나. 세상은 계속 더 뛰어다니고 경쟁하라고 부추기는데

노아의 방주는 언제 뜨나. 봄은 언제 오나. 어떻게 기다려야 훗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다리지 않고 마중 나가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마중나가면 훗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p. 174 <봉황 문양>

진정한 반성은 희망 없는 오늘을 새로운 내일로 데려가는 강력한 힘이 된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일기를 쓴다. 거의 데스노트와 다름 없는 나의 감정의 쓰레기통이다. 그런데 그렇게 쏟아내고 하루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엄청 힘이 된다. 반성은 해서 나쁠 것이 없다. 자학이 아니라 자기 반성과 보호가 적절히 이루어진다면 하루하루 담을 의미가 넘쳐나지 않을까.


p. 182 <야생 버섯>

식물생리학을 전공한 김성호 교수는 내가 좋아하는 분이다. 그이의 책 <나의 생명수업>(웅진지식하우스)에 나오는 이런 문장은 얼마나 멋진가. “버섯의 벗이 되려면 버섯보다 많이 큰 내가 먼저 버섯의 높이로 땅에 엎드리면 된다는 것.” 나는 야생버섯의 맛과 추억에 취하기만 했지 엎드려보지 못했다.


버섯의 눈높이로 무언가를 바라본지가 너무나도 오래 된 것 같다. 


p. 192 <모퉁이>

구부러지거나 꺾어져 돌아간 자리를 모퉁이라고 한다. 길에 모퉁이가 없다면, 집에 모퉁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도대체 그리워할 일이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모퉁이 저쪽을 상상할 일도 없고, 비행기 활주로나 고속도로처럼 인생은 황막해졌을 것이다.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들었다. 모퉁이가 없다면 숨바꼭질을 어떻게 하며, 계집애들의 고무줄을 끊고 어디로 달아나 숨을 데도 없었을 것이다.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맘에 담아둔 여자애의 집 앞 골목을 지나갈 때 설레는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모퉁이가 없다는 것은 곡선이 없다는 것. 막막하고 뻣뻣한 직선이 세상을 지배했을 것이다. 삿대질과 공격적인 전투와 전진만이 우대받고 모든 여성적인 것은 뒤로 밀려났을 것이다. 모퉁이가 없다면 골목길에서 자전거 핸들을 멋지게 꺾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연인들이 담벼락에 붙어 서서 키스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별 후에 돌아서서 숨죽여 흐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퉁이가 없다면 예비군훈련 가서 키득거리며 한쪽에서 오줌을 내갈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결핍이 모퉁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모퉁이는 아쉽고 그리운 것들을 낳았다.

개발이라는 이름의 굴착기는 모퉁이를 지우는 일에 열심이다. 산모퉁이는 깎아내고 길모퉁이는 반듯하게 바로잡는다. 편리성과 합리를 앞세워 현대적인 것을 추구한다. 현대적인 것은 모퉁이가 없다. 모든 현대적인 것은 그래서 그리움을 용도 폐기했다.


p. 234 <최일남>

선생의 신문 칼럼도 큰소리로 외치거나 주먹을 내지르는 대신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 문장으로 독자를 사로잡았다. 글쓴이의 숨소리와 발소리가 들리는 문장. 그리하여 독자의 살 속에 다복다복 들어와 박히는 문장. 선생은 우리말 하나하나를 명주 수건으로 닦아 미천한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작정하신 분 같다.

언젠가 직접 전화를 주셨는데, 이유인즉 내가 쓴 글에 들어 있는 ‘완산칠봉’이라는 말을 발견하고 반가워서였다고. 그때는 참 철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서울에 계시지만 고향 전주를 떠나지 못하고 계신.


p. 278 류성룡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p. 286 황재형

1983년 화가 황재형은 태백의 탄광촌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스스로 신입 광부 ‘햇돼지’를 자처한 것. 그는 낮에는 탄광에서 직접 곡괭이를 들었고, 일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는 붓을 들었다. 탄광은 ‘막장’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곳이며 더 이상 갈 데 없는 이들이 다다르게 되는 곳. 그는 생의 막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겪어야만 예술의 돌파구가 생긴다고 믿었다. 탄광이라는 현장에 밀착하면 할수록 생생한 예술의 본질에 닿을 수 있을 것이었다. 황재형은 화가로서 승부를 건 것이다. 그는 탄광을 타자의 시선으로 보지 않기 위해 무려 3년간 ‘산업전사’로 일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단순한 현장체험이 아니었다. 깊은 밤에 눈보라처럼 달려드는 고독과의 싸움이었을 것이고, 질척질척한 생의 비의를 캐내는 참혹한 마음공부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광부화가’로 부르기 시작했다. 헤드랜턴을 쓰고 도시락을 먹는 ‘외눈박이의 식사’나 검은 개울물이 흐르는 ‘탄천의 노을’ 등의 작품은 그렇게 태어났다.

이제는 그의 이름 앞에 ‘광부’라는 말을 빼고 우리 시대에 가장 감동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불러야 한다. 나는 그의 작품 ‘연탄’의 이글거리는 불꽃을 좋아하고, 눈 쌓인 산줄기를 위에서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백두대간’도 좋아한다. 황재형의 그림은 평면이지만 그의 손에 의해 풍경과 사물은 하나같이 꿈틀거린다. 이 겨울, 가슴 쿵쾅거릴 일이 없다면 황재형의 그림을 보라.


탄광의 작가 황재형과 오치균 3월 16일까지 가나인사아트센터 ‘‘기억과 체험’ 전 기사의 사진



p.380 <음나무>

음나무 가시는 잎을 따먹는 동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겨났다. 이른바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 나무가 어릴 때는 위험으로부터 취약하기 때문에 가시가 매우 날카롭고 가시의 개수도 많다. 그런데 음나무 줄기가 굵어지고 잎사귀를 허공 높은 곳으로 매달기 시작하면 가시가 무뎌진다. 생의 정착 단계에서 가시가 퇴화하는 것이다. 키가 크고 수십 년 된 음나무의 수피는 이게 언제 음나무였을까 싶을 정도로 검은 회색으로 변해 있다. 세로로 난 수피의 무늬도 뚜렷해진다. 가시는 뾰족하지 않고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면 사람도 가시를 세우는 것일까? 나이를 먹어도 가시를 거둬들일 줄 모르는 사람은 그럼 뭐지?

p. 408 연꽃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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