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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독서 에세이 및 인상 깊었던 구절

by 그네* 2024.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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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영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를 읽고

에세이 제목 : 사라졌으나 사라지지 않은 집에 대하여

유난히 더웠던 2024년 여름, 단 한 번도 고친 적 없던 26년 된 엄마와 아버지의 집을 고치기로 마음먹었다. 7월에 집이 완성되자 언니가 내게 책 한 권을 던져주며 말했다. "니가 되게 좋아할 책이야. 꼭 한 번 읽어봐." 그 책은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였다. 책 속에 등장하는 집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 집에 살고 있는 내가 보일 정도로 이입하며 읽었다. 20대 동안 5개의 방과 집을 거치며 느꼈던 내 경험과 포개졌다. 엄마와 아버지의 집을 고치려 설득하기 전에 '이 책을 드렸으면 좀 더 수월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구절구절 공감이 되었다.

 

부모님 집 고치기 프로젝트의 시작은 험난했다. 가족들이 모두 반대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전기 나오고, 물만 나오면 됐지. 우리는 여기서 살다가 갈란다."라는 매운 농담과 함께 쓸데없는 돈 낭비 하지 말라고 반대했다. 고쳐봤자 어차피 좁은 집이라 별로 모양도 안 나고 기대감도 없다고 했다. 언니도 부모님이 조카 육아를 도와주고 계시기 때문에 리모델링 동안 육아 공백이 생길까 봐 미루기를 바랐다.

 

그러나 26년 만에 돌아온 기회였다. 일단 견적만 보자 하고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리모델링 회사 관계자들과 약속을 잡아갔고, 여섯 군데로부터 견적을 받았다. 예상보다 두 배로 뛰어오르고 있는 예산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리모델링 기간 4주동안 세월이 켜켜이 쌓여있는 짐들을 가지고 부모님이 다른 곳에 계셔야 했다. 부모님은 더운 여름 4주 동안 이 많은 짐을 들고 집 밖에서 어떻게 지내냐며 스트레스 받아했다. 어느 날은 '리모델링할까?' 했다가 다음 날에는 '무슨 리모델링이냐며' 하루하루 마음이 바뀌었다.

 

엄마와 아버지에게 탈바꿈한 집을 꼭 안겨드리고 싶었다. 새롭게 바뀐 공간이 엄마와 아버지의 짜증을 잠재워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엄마의 주방에서 요리하다 보면 나는 뭐든 늘 떨어뜨렸다. 그러면 없던 짜증이 솟구쳐 올라 내가 나에게 놀랐다. 주방 후드도 고장이 나 요리 연기와 불의 열기가 그대로 얼굴로 와닿았다. 비염이 있는 아버지는 온 집에 연기라며 요란하게 재채기하며 화를 냈다. 그때 깨달았다. '아! 어쩌면 엄마와 아버지의 짜증은 이 집이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금호동 이웃들의 삶에 녹아들 수 없었던 '품위'처럼 우리 집도 마음의 여유가 깃들 곳이 없었던 공간이었다.

 

또한, 엄마와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취향이 담긴 공간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부모님은 적금만 모아 모아 내가 10살 때 온 지금의 집으로 내 집 장만에 성공하셨다. 엄마는 "누가 와도 내 집이라 이제 안 나가도 된다"를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말하곤 했다. 이후 이어진 언니와 나의 대입과 등록금 밀어넣기를 하고 나니 이사나 새집은 생각할 여력도 없이 이렇게 시간이 지나와 있었다. 가구도 이모가 이사를 가면서 준 고동색 테이블을 집에 들고 왔다가, 어느 날은 모던한 유리 테이블을 어디에선가 주워 오기도 했다. 통돌이 세탁기와 김치냉장고를 포함해 가전도 모두 최소 10년을 넘긴 아이들이라 숨을 헐떡이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집은 터질 때까지 쓴다."를 자랑스럽게 외치며 가전제품들을 학대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엄마와 아버지에게도 공간에 대한 로망은 있었다. 엄마는 주방에 6인용 식탁을, 사진이 취미인 아버지는 카메라 암실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사는 게 바빠 마음 깊은 곳에 넣어둔 생각들이었다. 그 로망을 다시금 꺼내어 실현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주방 옆 아버지 컴퓨터 방을 터서 주방 다이닝룸으로 만들고, 가장 큰 안방을 아버지의 카메라 암실이자 작업공간으로 쓰자고 했다. 안방에는 작은 에어컨도 있고 빛 차단도 잘 되어 암실하기에 딱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완전 꼬였다."라며 못 이기는 척 짐을 싸고 리모델링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하재영 작가의 집에 대한 '아등바등'이라는 말이 참 마음에 남았다. 내게 맞는 온전한 나만의 공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부단히 노력해야 주어지는 공간임을 우리 가족은 26년 만에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이 만들어내는 힘에 대해서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리모델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과 함께.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이 집이 온전한 나의 집이 되리라 믿었다. 내가 바꾼 공간이 이곳에서 보낼 나의 시간을 바꾸리라 기대했다.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아등바등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절박하게 애쓰지 않으면 나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집을 고치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중에서 -

 

수많은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을 받으며 집이 바뀌어 나갔다. 인테리어 업체, 가구 사장님, 이사팀들 모두 부모님 집을 바꾼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하며 하나라도 더 거들어주려고 하셨다. 오래된 집이라 천장이 콘크리트인 문제 때문에 조명이 엉뚱한 곳에 달릴 위기에 처했다. 엄마의 6인용 식탁을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인테리어 실장님의 말에 나는 엄마의 로망이라며 6인용 식탁을 꼭 깔아야 한다고 부탁했다. 그러자 실장님도 여러 대안을 고민하다가 천장 조명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다이닝룸만 목공 작업을 서비스로 해주겠다고 하셨다. 목수 인건비만 해도 부담스러운 요즘에 한마음 한뜻으로 엄마의 6인용 식탁을 위해 다들 애써주셨다. 붙박이장 사장님도 '이건 어머님이 안 써보셨을 사이즈일겁니다.'라며 엄마의 새로운 공간 경험을 위해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 신경 써주셨다. 보관 이사팀도 부모님집이라는 이야기에 어떻게든 견적을 좋게 내주려고 하셨다. 누구보다도 나의 남편 기린은 함께 연차를 내가며 이리저리 알아보고 모든 과정에서 함께 해 주었다. 업체분들이 둘 중 어느 분 부모님의 집이냐고 혼란스러워할 정도로 기린도 진심이었다.

 

그러나 수월하게 흘러가면 가족이 아니다. 집 고치기 프로젝트의 걸림돌은 계속해서 우리 가족이었다. 4주 동안 부모님이 언니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오피스텔에서 지내느니 엄마가 조카도 돌봐주고, 엄마가 해주는 밥 먹으며 편히 직장을 다니라는 딸을 향한 엄마의 선의였다. 그러나 4주 동안 엄마와 언니는 피 터지게 싸웠다. 가족의 일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표면으로 보면 '뭘 이런 일에 화를 내나' 싶었지만 파다 보면 쌓여온 상처와 결핍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현상으로만 보면 4주 동안 더부살이하게 된 엄마가 괜히 언니 부부의 눈치를 보다 보니 언니의 짜증에 '우리가 불편한가?'로 촉발되어 일어난 싸움이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엄마의 화를 99도에서 100도로 끓게 한 것은 '공간의 부재'였다. 공간은 곧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엄마는 엄마의 공간이 사라진 채 집안일과 육아는 도맡으면서도, 공기처럼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단순히 공간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엄마의 모든 노력과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 내면에는 9년 동안 이어진 엄마의 육아를 당연시해 온 언니 부부에 대한 서운함이 쌓이고 있었음을, 가족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언니는 언니대로 노력하고 있지만 엄마의 높은 기준과 꽉 막힌 통제감에 서러움을 토로했다. 엄마와 아버지 모두 간절히 어서 리모델링이 끝나면 좋겠다고 했다. 어느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공간인 우리 집으로 가기를 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완성된 집에는 예전의 모습이 하나도 없었다. 창호, 화장실 타일 한 장까지 모두 바뀐 집에는 엄마와 아버지의 취향으로 채워졌다. 엄마는 새로운 6인용 식탁에서 소 법전 두께에 버금가는 '내면 소통'이라는 책과 마종기 시인의 책을 허기진 사람처럼 읽어갔다. 마음에 여유가 생긴 엄마는 언니를 불러 담담하게 사과했다. 이후로도 6인용 식탁 한쪽에는 늘 책들이 조금씩 쌓여있다. 식집사인 기린은 엄마가 "나도 여유만 되면 이렇게 식물 키우고 싶다."라며 스치듯 했던 말을 잊지 않고 베란다에 식물존을 구성해 주었다. 엄마는 식물들을 가꾸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했다. 원래 내 방이었다가 아버지의 작업 공간으로 쓰였던 공간은 이제 철거되고, 벽면에 붙박이장을 짜 커피를 좋아하는 부모님을 위해 작은 홈카페 존을 구성하고 커피머신과 토스트기를 들여놨다. 늘 찬장 어딘가에 처박혀있어 잊혀졌던 예쁜 커피잔들도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두었다. 아버지의 방에는 보기만해도 좋다는 카메라 필름 확대기가 턱 하니 놓여있다. 빛 차단을 위해 암실용 암막 커튼을 달 때 아버지는 소년이 된 것 마냥 설레어 하셨다. 그림을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를 홀로 즐기는 아버지의 취향에 맞게 방에는 이젤과 악보가 널브러져 있다. 아버지는 방석이 달린 것도 싫다며 딱딱한 나무 의자를 선호한다는 걸 이 기회에 알게 되었다.

 

이번 추석에 처음으로 엄마의 6인용 식탁에서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었다. 조카는 내게 "이모 불쌍해!"라고 했다. 지금은 다이닝룸이 된 곳이 원래 내 방이었는데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언니의 방은 엄마의 방이 되어 뼈대는 남아있는 것에 반해 내 방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주방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조카에게 웃으며 "이모 기억 속에 다 있어서 괜찮아!"라고 답했다.

 

저자가 말하듯  내 삶의 기원, 내 뿌리였던 과거의 그 집을 나는 상실했다. 처음 이사 온 10살의 내가 '남의 집 같아서 잠이 일찍 깬다'며 좋아했던 채광 가득한 우리 집. 언니와 낄낄거리며 놀던 거실. 야자를 마치고 돌아와 포도 한 송이를 꺼내 먹으며 부모님과 이야기하던 식탁. 잔잔한 새벽에 홀로 공부할 때면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행복해하던 내 방 책상. 이제는 다 사라졌다.

 

그러나 뿌리였던 집이 새롭게 변해 엄마와 아버지의 취향대로 바뀌어나갈 앞으로가 기대된다. 이제야 이 집이 조금이나마 제자리를 찾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반대해서 미안하다며 공간의 힘이 대단하다고 느낀 부모님은 요즘에 다행히 싸우지 않고 평화모드다. 부모님 집 고치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나 역시 많이 성장했고 뿌듯하다. 거금이 오가기에 심장 떨려 하면서 불신과 믿음 사이에서 판단하고, 여러 상황과 가족들의 관계를 살피는 과정에서 한 뼘 더 성장한 어른이 되었다. 나의 유년기 집은 사라졌지만, 한 편으로는 부모님의 취향이 가득한 사라지지 않은 집이 되었다. 변화한 공간에서 부모님이 무엇을 좋아하며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며 스스로를 더욱 가꾸어나가면 좋겠다.

 

인상 깊었던 부분

P. 83 

품위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존중받기를 원하는 만큼 타이늘 대접하는 사람, 나의 상처가 아픈 만큼 남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품위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자, 가진 것 없는 자가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방어선이었다. (중략) 다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그런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어떤 환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는 품위와 교양과 인격이 다른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태도였다.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끝내 화만 남은 이들에게는 인간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이웃들을 좋아할 수 없었지만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다. 

 

P. 104

내가 지낼 공간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는 시간은 처음으로 스스로를 책임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순간이었다.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면 이 집이 온전한 나의 집이 되리라 믿었다. 내가 바꾼 공간이 이곳에서 보낼 나의 시간을 바꾸리라 기대했다. 그렇게 일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아등바등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절박하게 애쓰지 않으면 나의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집을 고치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P. 119

연인이 된 범준이 사랑한다는 말만큼이나 자주 했던 말은 "당신 잘못이 아니야"였다. 나는 살면서 겪은 모든 불운을 내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 모욕을 당했을 때, 배신을 당했을 때, 험담을 들었을 때, 심지어 폭력을 당했을때조차 상대를 원망하는 대신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았다.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믿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만만해 보이지 않았다면, 명확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면, 그 말을 했다면, 참지 않았다면... 나는 가정법으로 과거를 재구성하면서 스스로를 벌주었다. 나는 탓하고 평가 절하하던 사람들의 말을 내면화했다. 

 

P. 121 

범준과 함께라면 오랫동안 소망했던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것 같았다. 서로에게 기꺼이 영향받고 동시에 나 자신으로 자유롭게 존재하는 관계를. 자유롭다는 것은 나의 의지나 노력만이 아니라 나와 상대가 맺고 있는 관계에서 가능해진다. 그와의 결혼이 타협, 해결, 목표, 희생, 의존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샬럿 브론테의 '제인에어'에 나오는 문장처럼, 우리의 시간이 "홀로 있을 때 만큼이나 자유롭고 여럿이 있을때만큼 즐겁"기를 바랐다. 열정적 사랑이나 낭만적 결혼이 아니라 온화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지지하는 관계가 되고 싶었다. 그와 함께, 나의 삶을 살고 싶었다. 두 사람이 함께, 서로의 삶을 사고 싶었다. "여성의 삶을 방해하고 축소하는 가부장적 결혼이 아니라 여성이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과정의 연장선상으로서의 결혼"(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그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었다. 

 

P.130

공간을 소유하는 것은 자리를 점유하는 일이었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물음만큼이나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하는 물음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집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집에서의 내 자리'를 인식하는 일이었다. 사회도 물리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장소이므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나의 위치도 자리의 문제였다. 이것은 하나의 화두가 되었다. 넓게는 이 세상에서, 좁게는 이 집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

 

P. 134

쓰는 사람은 작가라고 불리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다. 나의 서사를 나의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는 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쓰기는 삶의 특정한 순간을 다시 한 번 살아내기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뭉뚱그리지 않기. 외면하고 싶었던 고통, 분노, 슬픔, 상실, 결핍을 다시 한 번 겪어내기. 그것은 나 자신의 이방인이 되는 일이다. 

 

 P.139 

 장소에 대한 투쟁은 존재에 대한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P. 143

엄마에게 독서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기만의 정신적 공간이었으리라. 

 

P.163

아빠는 나를 모르면서도 사랑했고 알면서도 사랑했다. 아빠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아니라 딸이라는 사실 그 자체였다. 

 

P.166

가부장제는 약함을 여성성으로, 강함을 남성성으로 환원하므로 아빠는 자신이 강하지 못할 때 보이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했다. 아빠 또한 남성의 감정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아니었을까?

 

P.187

기억이 담긴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이야깃거리를 소장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P.188

그 집은 이후의 내가 집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나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최초의 집은 우리 삶의 기원, 뿌리가 되어준다. 

 

198

집에 대해 쓰는 것은 그 집에 다시 살아보는 일이었다. 간절히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절일 것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이야기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은 시절. 나는 집에 대해 쓰려 했으나 시절에 대해 썼다. 내가 뭔가를 알게 되는 때는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다. 현재의 집이 가진 의미를 깨닫는 것도 이곳을 영원히 상실한 다음일 것이다. 아직 이 집은 한 시절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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